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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수행평가 하던 기억을 더듬어 6.25전쟁 알아보기_발발 배경

안녕하세요 지아니맘입니다!

오늘은 6월 24일, 하루만 더 있으면 6월 25일입니다.

 

한국에서 초중고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하신 분이라면, 항상 이맘때 쯤, 6.25 전쟁에 대해서 숙제가 나왔던게 기억 나실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벌써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문득 옛날에 교복을 입고 숙제를 하느라 참고서를 뒤적거리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오랫만에,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625 전쟁을 알아 보았습니다.

 

1. 명칭

6.25 전쟁은 공식명칭으로는 6.25 사변 혹은 6.25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약식으로, 6.25로 부르기도 하고, 외국에서는 한국전쟁(Korean war) 라고 부르기도 하죠. 북한, 중국에서는 조선전쟁 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어르신들은 내전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로, 한국동란, 6.25 동란이라고 부르시기도 합니다. 

2. 6.25 전쟁 발발 배경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했습니다. 이때로부터 딱 5년전인 1945년, 당시 한반도는 일본에서 독립을 한 후, 미군과 소련군의 점령기간이 끝나고,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상황이었죠.(이 점 때문에, 6.25 전쟁이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 때, 소련군은 아시아 공산화를 꿈꾸는 상황이었고, 중국은 1949년 10월 1일, 중국 국민당을 대신해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정권이 수립된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미국은 주한미군이 철수하고(1949년 6월), 애치슨 선언(1950년 1월,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한정한 선언)을 하는 등, 대한민국에 군사 원조를 줄여가는 상황이었습니다. 

 

1) 북한의 상황

박헌영과 김일성

 북한에서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6.25 전쟁을 주도했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대한민국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대남공격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북한이 대남공격을 감행 시, 대한민국 내부에서도 대규모 민중봉기로 호응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래서 북한 내부에서는 조선노동당의 일당독재를 기반으로 전쟁 반대파(민족주의자, 종교인 등)을 숙청하고, 대외적으로는 수차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뚱을 만나 48회나 남침 허락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따르면, 애초에 스탈린은 인민군이 절대적 우위가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공격을 반대한다는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인민군이 미국과 국군을 상대로 단독전쟁을 치를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2차 대전이 종식된지 얼마 안되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직접마찰이 부담스러웠던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수 차례 스탈린을 설득하여, 스탈린은 마오쩌뚱의 중화인민공화국이 함께 지원을 하는 조건으로, 남침의 승인 및 중국을 통해 소련의 최신 무기를 대량으로 제공하기로 합니다. 

 북한은 6.25전쟁을 준비하면서 대한민국에 대해 샅샅이 파악해 나갔는데, 특히 평향에서 발견된 정보문건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각 행정 소재지의 쌀, 보리 등 모든 농작물의 예상 수확량까지 파악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이 한해동안 전쟁물자로 공출할 수 있는 물자를 계산할 정도로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했죠. 그리고 전쟁 보름전인 1950년 6월 10에는 현재에도 유효하게 사용하는 화전양면기만술의 일환으로, 북한측 인사 김삼룡 및 이주하를, 북한에서 억류중인 조만식과 38선에서 맞교환을 제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1950년 6월 12일부터, 인민군을 38선 이북 10~15km 지역으로 재배치하고, 구체적인 침공계획을 소련에 알렸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전무했던 T-34,T-38 등 소련의 전차를 확보해놓고, 일제시대 때, 전쟁용으로 뚫렸던 도로의 폭을 2배 이상 정비까지 완료해 두었고, 1950년 6월 24일에는 38선 부근에 야전병원까지 설치 완료했었죠.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전쟁 하루전 날, 군 장병들에게 휴가를 주는 등, 전혀 전쟁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2) 대한민국의 상황

이승만

 북한이 이처럼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해나가는 동안, 대한민국은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은 미국에서 귀국한지 얼마 안되는 입장이었고, 국내의 좌익정당, 김구와 같은 국내파 민족주의자들,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이 서로 반목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대치상황을 감안했을 때, 한반도에 육군을 투입하는 것 보다, 태평양에서 해군전과 공중전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배경으로 1949년 6월 29일 철수해버리고 말죠. 김일성에게 적극적으로 군사지원을 한 소련과 달리, 미국은 대한민국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매우 취약했습니다. 1949년 말,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북한이 38선에서 전면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고, 관련하여 인민군의 병력이동상황까지 기재된 보고서도 제출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에 군사적 대비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미국의 CIA는 북한의 남침가능성을 낮게 평가하고, 보고서들은 군사원조를 얻기 위한 것으로 폄하했다고 합니다. 소련과의 충돌을 원하지 않았던 미국은 국군의 전차와 전투기를 오히려 모두 압수하고, 곡사포, 대전차포를 90%이상 압수해버렸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이런 행보가 남침유도설의 근거로 꼽히기도 하죠. 

 

오늘은 6.25전쟁이 일어난 배경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이상, 지아니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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