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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수행평가 하던 기억을 더듬어 6.25전쟁 알아보기_6.25 전쟁의 진행과 결과

안녕하세요! 지아니맘입니다.

 

지난번 글에서는 6.25전쟁의 발발 배경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오늘은 전쟁의 진행과정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6월 25일, 바로 6.25전쟁이 일어난지 딱 7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여담이지만 요새 72세는 젊은이라는데, 6.25 전쟁을 경험해보신 분들이 꽤 많으실 꺼라고 생각합니다.

 

6.25 전쟁의 발발과 진행, 그리고 종결

 6.25전쟁이 본격 발발하기 이전에도, 여러번의 전투가 있었다고 합니다. 1949년 1월부터 1950년 6월 25일 이전까지, 소소한 여러 전투는 총 874회나 되었다고 합니다.  남침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국군이 먼저 침입한 횟수는 432회고, 그중에 상당수는 비행기나 함대로 습격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 국군은 미국에 상당수의 무기를 압수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찰을 위해 쓰이는 연락기 포함, 대한민국이 보유한 항공기는 고작 22대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북한은, 대한민국이 공격을 했기 때문에 부득이 반격을 한다는 허위 선전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기습 남침을 감행하였습니다. 물론 수적, 장비적으로 대한민국이 심각한 열세였기 때문에, 6.25당일 오전내에 동두천과 포천까지 함락당했고, 50년 6월 26일에는 의정부, 50년 6월 27일에는 도봉구, 50년 6월 28일 새벽에는 서울 시내가 점령되어, 오전 2시반에 국군은 긴급하게 한강 대교를 폭파하여 북한의 남하를 임시로나마 저지했습니다.

  그 사이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50년 6월 27일 미해공군에 출동을 명령하고, 6월 30일에는 미 지상군의 출동을 명령했습니다. 이어 50년 7월 7일에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맥아더 장군을 총 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고, 50년 7월 8일에는 유엔군도 참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50년 7월 14일에는 미군이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을 통제하게 됩니다.

 한편 그 사이에, 대전까지 점령한 인민군은 진격로를 호남평야를 통해 남해안 연안으로, 경북 낙동강 방면, 영천 및 포항쪽을 향해 동해안 방면 세 방면으로 나누어 침공을 계속하였는데, 국군은 북한의 공세에 밀려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계속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50년 8월16일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대구를 점령한 북한군 6만명이 궤멸되었고, 이 사이에 10여개국에서 파견한 연합군과 국군은 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감행 성공으로 전쟁의 상황이 반전을 맞게 됩니다.50년  9월 28일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였고, 점령당한지 3개월 만에, 서울을 다시 수복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50년 10월 19일에는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 다다랐고, 50년 10월 26일에는 국경지대인 초산까지 이르러 거의 북한군의 섬멸을 눈앞에 앞두었습니다.  

  그러나 마오쩌뚱은 미국이 북한을 흡수하면, 머지않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진격할 것이고, 타이완도 이에 호응할꺼라는 추측으로, 50년 11월 28일, 인해전술이라고 불리는  50만명의 병력을 무기로 참전을 결심하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중화인민공화군은 내전이 막 종식된 상황이었고, 대부분의 인민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기 때문에 참전자가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중국의 예상치 못한 반격에, 국군과 유엔군은 50년 12월 4일에 평양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12월 9일에는 원산을 철수하였고, 50년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전선의 국군 12만명과 피난민 10만명이 흥남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하였고, 이듬해 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공산군에 내어주는 1.4후퇴를 겪게 됩니다. 1월 7일에는 수원도 함락됩니다. 이 와중에 국군 9만명이 간부들의 횡령으로 아사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남진이 계속되었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원산 등 북한지역에 폭격을 감행하고, 3월 2일에는 국군이 한강을 넘어 3월 14일에는 겨우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엇습니다. 3월 24일 이승만은 만구 국경까지 진격하기 전까지는 휴전은 안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했지만, 강원도 쪽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지금의 휴전선인 방어선이 구축되었습니다.  

 공산측은 전세가 유리하게 흘러가지 않자, 51년 6월 23일 소련의 유엔 대사 마리크를 통해 6.25전쟁의 정전을 제의했습니다. 철저한 반공주의를 지향했던 이승만은 소련의 휴전안을 거부했으나, 6.25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부담스러웠던 미국은 휴전협정에 호응했습니다.

 이에 51년 7월 8일 개성에서 정전 예비회담이 개최되었고, 51년 10월 25일 판문점에서, 51년 11월 28일에는 당시 전선을 임시 휴전선으로 채택하는 등 휴전협정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국군은 여전히 휴전에 반대했기 때문에 각 전선에서는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휴전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35년 3월 19일 소련 내각이 6.25 전쟁을 종결한다는 결정을 북한에 통보하고, 북한은 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 및 유엔측의 승인으로, 53년 7월 22일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6.25 전쟁의 결과

약 3년간 걸친 6.25 전쟁은 쓰인 폭탄의 수는 1차 세계대전에서 쓰인 폭탄수와 맞먹는다는 말이 있을정도로 치열했습니다. 그 밖에도 북한의 10% 인구가 사망하였고, 양 측을 합해 250만명이 사망, 80%의 산업시설, 공공시설, 교통시설이 파괴되었으며, 미국과 소련, 유엔, 중공군까지 참전한 3차대전에 가까운 전쟁이었습니다.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사망자는 백여만명에 달하고, 그중 85%는 민간인이었다고 합니다. 

 남한에서는 전쟁을 통해, 미군의 주둔,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전쟁 이후의 공산세력을 방어하고, 전후 복구 성장동력을 얻다보니, 반공주의가 국가이념으로 굳어져, 이승만의 독재유지에 활용하였다는 시각이 있고, 북한 김일성은 6.25전쟁 실패의 책임을 박헌영, 김무정등 정적들에게 뒤집어 씌워 숙청함으로써 김일성 공산왕조체제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오늘은 6.25전쟁의 진행과 결말을 알아보았습니다.

전국의 초중고 학생 분들, 아마 이맘때 쯤이면 수행평가로 6.25 전쟁을 조사해오라는 숙제 많이 받으실텐데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지아니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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